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 윈 (문단 편집) === 처참한 경제정책 === 네 윈은 경제를 국유화시키고 외국자본의 진출을 막아[* 어느 정도였냐면, 외국의 구호 단체도 금지시키며 오직 정부간의 인도적 지원만 허용했을 정도였다. 이쯤이면 사이클론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은 마당에 구호인력의 입국'''만''' 차단시킨 후배 [[탄 쉐]]가 더 양호해 보일 지경이다.] 경제적 자급자족정책을 추구했다. 즉,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시행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가 외교적으로 미국이나 소련에게서 원조를 많이 받는 능력도 없는데, 이 정책을 실시한 것이 비슷하게 고립주의적인 정책을 편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는 물론이고 북한의 [[김일성]]과도 비교해봐도 능력이 처참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가 오늘날처럼 파탄국가로 전락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고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북한도 경제 성장에 성공한 나라로 분류되었었고, 소련과 중국에게서도 원조를 많이 받는 스킬도 보유하고 있었기는 했다. 다만 1990년대에 소련 해체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고난의 행군등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이에 미얀마는 지하경제와 암시장이 활성화되었고 밀수가 횡행하며 국가경제가 점점 나락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미얀마 경제는 이러한 암시장이 사실상 미얀마의 실제 경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당시 버마 경제의 '''80%'''를 암시장이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제적 문제와 폭압정치로 미얀마의 지식인과 기술자,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화교 및 인도인 상인들이 인도와 방글라데시,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 등으로 빠져나갔고, 인도 및 중국과의 관계도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네 윈 정부가 추진하던 자립 경제정책 중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막장이었는데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외국인들이 3일 이상은 체류하지 못하게 막는 정책까지 있었고, 이 정책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이는 미얀마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버마 정부는 1972년 이후에는 외국인 체류를 1주일로 완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정책이였다. 게다가 1970년대에 네 윈은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거나 정권 간부들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정부 각료나 기업의 경영자를 [[낙하산 인사|전문성이 없는 군인 위주로 뽑기까지 했다.]] 더구나 네 윈 시기에도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 [[게릴라]]들이 [[미얀마 내부갈등|미얀마 각지에서 활동하고]] 이에 정부군들도 게릴라 진압에 소모되면서 미얀마는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경제발전에 집중할 힘이 탕진되며 자연스레 국력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네 윈은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폐정책도 막장이었는데 [[1985년]]에는 '50짯과 100짯 지폐가 암시장에 의해 사재기의 대상이 되고 다양한 반란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사용된다'는 이유를 들며 '고액권 25짯과 50짯, 100짯은 더 이상 법정 화폐가 아니다'며 이들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한 직후 75짯 지폐를 도입하고는[* 참고로 75짯 지폐가 발행된 이유도 걸작인 게 '''네 윈의 75세를 기념해서였다고 한다.'''], 바로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5짯, 35짯 지폐를 도입하고는 1987년 9월 5일에는 기어이 '''점성가로부터 9가 행운의 숫자라는 소리를 듣고''' 45짯, 90짯짜리 지폐를 찍어냈다. 그나마 교환 기간이라도 아주 짧게나마 줬던 1985년 화폐개혁과는 달리[* 다만 이 화폐개혁에서는 교환량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1987년 화폐개혁은 교환 기간이 있기는 커녕 그 어떠한 경고와 유예 기간도 없이 진행되어 수백만 명이 평생 모은 돈들을 잃고 미얀마 전체 화폐의 '''75%'''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며 나라의 경제는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결국 1987년 버마는 유엔으로부터 '세계 최빈국'으로 지정되었고, 경제난이 극심해졌으며 국민들의 불만도 갈수록 커져 이듬해 [[8888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윈의 경제정책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며 [[세계은행]]이 집계한 네 윈의 집권시기와 그 이후 버마의 1인당 GDP는 과장 안 보태고 아무리 먼 옛날의 통계라는 것과 당시 버마의 폐쇄성을 감안해도 '''통계의 신뢰성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준이 되었다.''' 사실 네 윈이 집권하기 전에도 버마는 세계은행의 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60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정확히 26.32$[* 이는 2023년 환율로도 267.5$에 불과한데, 참고로 당시에도 빈곤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1960년 환율로 158$로, 이는 2023년 기준으로는 1,600$ 정도다.]에 네 윈이 집권한 1962년 기준으로도 27$[* 2023년 환율로는 269$다.]로 집계되던 최빈국 중의 최빈국이었으나, 론 놀의 실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커녕 그가 집권할 동안 1인당 GDP 수치 '''최대치가''' 1986년에 약 42.3$[* 2023년 환율로는 116.1$다. 실질 가치는 오히려 절반 미만으로 떨어진 셈.]에 론 놀이 완전히 퇴진한 1988년 시점에는 정확히 35.83$[* 2023년 환율로는 무려 '''98.35$'''다. 1962년 수치와 비교하면 26년간 수치상으로도 1.4배도 성장하지 못했고, 실질 가치는 이전의 36.8% 정도로 떨어진 셈.]로 집계될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고, 심지어 1965~1967년에는 1인당 GDP가 무려 '''10$대(!!!)'''라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수치로 나왔다.[* 정확히는 1965년에는 16.6$, 1966년에는 12.8$, 1967년에는 12.9$였다. 이는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159$(1965년)/120$ 미만(1966~1967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네 윈이 집권한 26년 동안 미얀마의 전체 GDP는 6.125억 달러(1962)에서 13.93억 달러(1988)로 이전의 2.3배도 성장하지 못했고, 평균 경제성장률은 3.3%를 기록했다.[* 물론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61.06억 달러(1962)에서 35.42억 달러(1988)로 이전의 58% 정도로 떨어졌다.][* 참고로 미얀마의 1인당 GDP는 1990년(50.8$)에야 처음으로 50$를 넘겼고, 1995년(113.8$)에는 처음으로 100$를 넘겼으며, 2005년(221.9$)에는 처음으로 200$를 넘겼다. 2005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어가 2011년에 드디어 1,086.4$를 기록하여 1000$대를 넘기게 되었고, 이후 미얀마의 1인당 GDP는 2015~2016, 2021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성장을 이어가 2021년 기준으로 미얀마의 1인당 GDP는 1,209.9$다. 그럼에도 미얀마는 지금도 [[동남아시아]] 최악의 최빈국 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UN]]의 통계까지 참고하면 따르면 1970년에 미얀마의 1인당 GDP는 99$로 187개국 중 166위를 차지했지만 1979년에는 159$로 수치 자체는 늘어도 순위는 187개국 중 181위로 떨어졌고, 1988년에는 111$로 '''187개국 중 186위'''로 떨어졌다.[* 참고로 1988년 통계에서 최하위를 차지한 나라는 94$를 기록한 [[베트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